여주에서 출발했을 때는 이미 어둑해진 뒤였다. 상주 부근에서 주말 고속도로 정체가 시작되었고 극심한 노동의 대가로 육신은 눅진하게 피곤하다. 오후 일곱 시 삼십 분 즈음 아내가 장모님에게 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휴대폰을 한 번 열어본다.

6개월 밖에 시간이 없다는 의사의 최종 진단을 듣고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가족은 속수무책에 아프고 두려웠지만, 진단처럼 6개월의 삶만 살다가 가셨더라면 터질 듯이 슬퍼하는 자식들 때문이라도 당신은 젖먹던 힘까지 짜내서 최대한 살아 주셨던 것이다. 시간 확인 후 전화를 걸어 보려던 참에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처럼 보내고 계실 당신을 생각하면서 수납되어 있던 많은 기억이 하나하나씩 꼬리를 문다.
장인 어른이 떠나신 지 29년, 자식들 전부 출가시키고 홀로 사셨던 장모님의 외로움이 그 쓸쓸함의 깊이가 어느 만큼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어미라는 명찰을 가슴에 붙이고 살고 있을 지금의 70대와 80대 이 땅의 어미들이 그렇듯 꽃다운 청춘과 빛나는 젊음과 활기차고 보람된 중년이 보장된 삶은 말 그대로 그저 "희망 사항" 이었을 게다. 한집안의 안 주인이 된 후 2년 터울씩의 아이들 넷을 낳고 장손의 안 주인이 된 만큼, 거두어야 할 친척 식솔들 때문에라도 손에 물기 마를 날이 없었다. 챙겨야 할 화급한 일들을 치르면서 장모님은 당신 자신을 위한 시간은 있었을까. 자식들 키우면서 험상궂게 서 있는 세상사 일들에 부대끼고 힘들어서 몰래 눈물 흘릴 때면 당신은 어찌했을까. 그럴 때면 당신은 당신에게 얼마만큼 다정하게 잘 해 주었을까.

장모님을 찾아뵙거나 하면 당신은 특유의 환한 미소로 즐겁게 바쁘셨다.
"이 서방 밥은 무 꼬."
내가 지금까지 장모님의 사위가 되고 나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식전이라는 말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간간한 된장찌개에 무우 무침에 나물 겉절이에 장모님 손이 아니면 구경조차 힘든 장모님 표 밥반찬으로 뜨끈한 집밥이 완성되어 차려지는 것이다. 보통 밥공기의 크기보다 훨씬 컸던 사위 밥그릇의 바닥이 보일 참이면 여지없이 꽂혔던 그 말
"더 무. 더 무라"
당신 스스로가 배불리 먹는 자식들의 모습을 보고 더 든든하셨을까. 당신이 보냈던 힘 든 세월 때문에라도 밥 만큼 든든한 것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셨을까. 

고속도로 정체 때문에 서 있는 차들의 불빛에 별 처럼 많은 기억들이 안긴다.
투병 중에 가족들과 떠났던 여행에서 당신은 아프지 않다고 하셨다. 밥 처럼 드셨던 약을 한 주먹 털어 넣으시면서도 당신은 괜찮다고 하셨다.  나중에 까무러쳐서 슬퍼할지도 모를 가족들 때문에 자식들이 후회하지 못하게 당신은 끝까지 힘껏 같이 다니셨고 자식들이랑 사진도 많이 찍으셨다.  온몸으로 퍼져있는 암세포는 잊고 아들을 보고 딸을 보고 손주를 보고 푸지게 함박꽃을 피우셨다. 

아내와 결혼 전 당신은 난생 처음으로 맥주 한 잔을 드셨다. 손주들을 안고 세상 행복해 하셨던 모습, 중국 여행에 다녀오시고 동네 사람들에게 막내 사위 자랑 마르고 닳도록 하셨더랬다. 자식들을 위해 만든 파김치며 총각 김치는 맛의 끝판왕, 약처럼 끓여 내셨던 가을 추어탕. 그 것들은 실제로 약이 되어 살 좀 쪄야 한다는 막내 사위의 살이 되고 피가 되었다. 당신은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쉬웠을까. 마구 주고도 행복 하셨을까. 
오래전부터 장모님과 만나면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 안았고 반가운 친구처럼 번갈아 가며 손등 뽀뽀도 잊지 않았다. 넉살 좋은 사위 때문에 당신은 즐거우셨을까.

방 두 칸짜리 전셋집과 병원과 자식들의 집을 거쳐 이제는 요양병원에서 계시는 당신을 찾았을 때 긴 고통의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혈색은 나쁘지 않았다. 피부가 곱고 이제 곧 나을 것이니 퇴원하시면 면허증 따서 같이 여행이나 다니자고 까부는 막내 사위의 재롱에 헐헐헐 웃으셨다. 

원래 태어나서 부터 당신은 긍정의 여왕, 아무리 세상사가 험상궂게 덤비더라도 당신의 의연함 때문에 당신이 버텨낸 세월 때문에, 그 웃음 때문에 나는 오래도록 손을 잡고 있으면서 분명 봄은 함께일 거라 믿었다. 제발 그렇게만 되자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체된 고속도로 복판에서 뜨겁게 기도했다.  이윽고 전화가 왔다. 지금 엄마랑 같이 있다고. 처형도 있고 오빠도 옆에 있다고 엄마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숨만 쉬신다고 아내는 말했다. 아내는 울지 않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음성속에 차분한 습기가 먹먹하다. 

나는 전화 수화기를 엄마 귀에다 대어 달라고 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할까.  

"아.아. 어무이 내 말 들리지요.~" 
말을 이을 수가 없다.  방금 전 당신과의 기억들을 연거푸 떠올리며 올렸던 기도와는 상관없이 당신은 많이 아프지 않은가.    
"사랑해요~ 사랑해요 어무이" 
힘겹게 숨 줄을 잡고있는 당신에게, 들을 수도 없는 당신에게 에라 모르겠다. 외치듯 말을했다.  
"어무이 사랑합니데이~ 사랑합니데이 알죠?"
살가운 막내 사위라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흔한 말이 아니었다. 허나 할 수 있으면 계속 할 수 있었고 또 하고 싶었다. 순간 전화 수화기에서 힘겹게 당신의 말소리가 마치 꼭 해주고 싶었다는 듯 희미하지만 거칠고 또렷하게 귓가에 꽂힌다.

"나--도---사--랑--해---"  

정체가 풀렸다.  거짓말처럼 도로가 뚫리고 내가 타고 있던 포터 트럭의 악셀을 밟는다.  
전화를 끊자마자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달리면서 내도록 그냥 주룩주룩 흐른다.  
다음날 당신의 막내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는 슬픔 때문에 많이도 부었고 또 슬픔 때문에 뚱뚱해 진 만큼 더 컷다.
장례를 치르고 다음 날 당신의 빈집을 찾았을 때 여전히 당신의 표정으로 단정하고 온전하다. 
장인어른 생전에 떠났던 제주도 여행에서 조랑말을 타고 수줍게 웃으며 찍었던 사진 액자, 아주 오래전 어느 해 명절날 큰 아들, 작은 아들, 큰사위, 작은 사위가 두루마기를 입고 함께 찍었던 사진이 좋다며 액자에 넣어두고 당신은 많이 든든하셨을까.  큰 형님과 내가 전셋집의 짐을 들어내면서 "어머니가 미처 우리에게 말하지 못한 땅 문서나 돈 다발 같은 것이 일을지도 모른다."는 우스개 소리에 키득 거리는 우리들 모습을 보고 당신은 모두다 같이 살았던 방촌동 앞 마당의 감꽃 처럼 웃으셨을까.

"엄마. 아무 걱정말고 잘 가. 남은 우리가 잘 살고 돈 많이 벌고 살테니 엄마는 아무런 걱정 말고 편안하게 가" 장례를 치른 후 임종을 지켰던 아내가 미처 그 말을 전하지 못했다고, 그 말도 못하고 바보같이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고 취기에 크렁해져서 말을 했다.

당신이 이 세상에다 남기셨던 마지막 메세지
"나도 사랑한다."
당신이 떠나기 전 마지막 하셨던 말씀. 그 말이 전부였다.
남아있는 우리가 당신에게 드려야 할 말도 그 것이 전부였다.

많이 외롭고 쓸쓸했던 당신. 그래도 연꽃 처럼 편안하고 따뜻하셨던 장모님.  
지금쯤 당신은 어디까지 가셨는지. 
먼 훗날 어쩌면 우리 다시만나서 "이서방" 하며 "어무이"하며 서로 부둥켜 안고 손목에다 뽀뽀하며 뜨겁게 포옹하실런지.



김옥순 여사님. 내 가슴에 "사랑"의 열매와 씨앗까지 깊게 심어주고 가신 나의 장모님 

당신은 최고였어요. 
편안히 잘 가세요.  안녕.  

작은 이서방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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